본문 바로가기
자취러의 식물 일기

물을 너무 줘서 죽어버린 식물 이야기

by barengilnews 2025. 9. 5.

처음 식물을 죽여본 날의 기분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잊을 만하면 문득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미안해지는 기억이 있다.

 

내가 처음으로 죽인 식물은, 너무 예뻐서 사 온 아주 작은 아이비였다.

이름도 없었고, 특별한 사연도 없었다.

하지만 그 식물은, 내가 식물을 ‘돌본다’는 것이 어떤 책임인지 처음 알게 해준 존재였다.

 

나는 식물을 사랑했다. 그러니까 잘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물을 자주 줬다.

너무 자주. 매일 아침마다 흙을 만져보지도 않고 그냥 물을 부었다.

무심한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열심히’였기에 그 식물은 결국 떠났다.

화분 속 식물이 과습으로 시들어버린 모습

 


이 이야기는 내가 얼마나 ‘과한 사랑’으로 식물을 죽였는지,

그리고 그 후로 내가 얼마나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 아이비와의 짧은 시작

그 식물은 어느 플랜트 마켓에서 우연히 만났다. 잎이 작고 줄기가 살짝 늘어지는 모습이 예뻤다.

초록빛이 방 안에 어울릴 것 같아 큰 고민 없이 데려왔다. 조그마한 화분 하나였고, 처음 키워보는 덩굴식물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커튼을 걷고 아이비를 바라보며, 식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일인지 실감했다.

하루가 바빠도 물 주는 건 잊지 않았다. 퇴근이 늦은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나는 늘 아이비에게 물을 줬다.

 

그게 문제였다.

 

🪴 이상한 기척

어느 날부터 잎 끝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건조해서 그런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물을 더 줬다. 그리고 며칠 뒤부터 잎 전체가 흐물흐물해졌다.

색도 탁해졌고, 줄기마저 힘없이 꺾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나는 ‘열심히’ 물을 주고 있었는데. 사랑을 주고 있었는데. 왜 점점 시들어가는 걸까.

그제서야 나는 흙을 깊이 눌러봤다. 촉촉함을 넘어서 축축했다. 손가락을 넣자 흙이 진흙처럼 손에 붙었다.

 

그건 명백한 과습이었다. 나는 물을 주면서도, 식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전혀 보지 않았던 것이다.

 

🪴 식물은 말하지 않지만, 말하고 있었다

나중에 식물관리사 자격증을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

식물은 과습에 매우 약하다. 특히 아이비처럼 뿌리가 얇은 식물은 배수가 잘 안 되면 쉽게 뿌리부터 썩기 시작한다.

 

그리고 식물은 ‘말은 못 하지만’ 확실히 시그널을 보내고 있었다.

잎이 힘없이 늘어지고, 뿌리 주변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잎 끝이 투명해지는 그 변화들은

도와달라는 말이었는데 나는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내 방식대로, 내가 정한 타이밍대로 물을 줬고,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내 만족을 채웠다.

식물의 리듬과 감각은 듣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통제에 가까웠다.

 

🪴 식물이 죽고 나서, 내가 배운 것

아이비가 완전히 말라버린 건 어느 장마철이었다.

곰팡이처럼 퍼진 뿌리썩음에 결국 화분 전체를 비워야 했고, 나는 작은 상자에 말라버린 잎과 줄기를 담아 베란다에 잠깐 두었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하게 슬펐다. ‘단지 식물일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돌아보면, 그건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무력감과 후회, 그리고 책임감 없는 돌봄에 대한 부끄러움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아이비를 잃고 나서 나는 식물을 키우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물은 매일 주지 않게 되었고, 흙을 만져보고 식물의 잎을 관찰한 후에만 주게 되었다.
물은 사랑이 아니라 소통이다.

그건 그 이후로 내가 식물을 돌보며 항상 마음속에 새기는 문장이다.

 

🌿 식물은 나에게 ‘지나친 마음’이 때로는 상처가 된다는 걸 알려줬다

나는 식물관리사 자격증을 따면서 수많은 식물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의 생리적 구조, 습도와 광도의 관계, 흙의 종류, 그리고 뿌리 호흡까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지식들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식물도 각자의 호흡이 있고, 내가 맞춰야 한다는 것.
과한 물, 과한 관심, 과한 손길이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짓누를 수 있다는 걸 나는 아이비를 통해 배웠다.

 

지금은 내 방에 식물이 많다. 몬스테라, 고무나무, 스킨답서스, 호야 등 다양한 반려식물들이 함께 산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매일 조용히 대화한다.


“너, 오늘 물 필요해?”


그 말 뒤엔 손으로 흙을 눌러보는 조심스러운 터치가 따라온다.

 

🍃 식물은 나에게 돌봄의 본질을 가르쳐줬다

물을 너무 줘서 죽어버린 식물. 그 이야기는 나에게 가장 뼈아픈 실수였고, 동시에 가장 값진 배움이 되었다.

식물은 돌보는 만큼 자란다. 하지만 돌봄이라는 건 내가 주고 싶은 걸 주는 게 아니라,

그 식물이 필요한 걸 이해하고 맞춰주는 일이라는 걸 나는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배움은 식물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어느정도의 무관심은 관계에 진전이 될 수도 있다는걸 깨닿게 되었고, 

때로는 너무 많이 주지 않는 것이, 진짜 사랑일 수 있다는 것. 식물은 그 조용한 죽음으로 나에게 삶을 가르쳐줬다.

 

내가 죽인 첫 번째 식물의 이름은 없지만, 나는 잊지 못한다

. 그 아이비는 지금도 내 마음 한쪽에서, 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로부터 배운 너라면, 이제는 잘할 수 있어.”